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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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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과 성기동 (군서면 구림리)

왕인은 일본 아스카 문화와 나라 문화의 성립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백제 사람이다. 도일의 연대가 명확치 않으나 서기 285∼405년 사이임은 분명하다.

그는 일본에 천자와 논어를 전하고 야공, 직공 등 기술을 가르쳤으며 황실에서 왕자들의 사부 노릇을 하는 등 일본인들의 존경을 모아 오늘날도 일본인들은 대판부 천북군 고석정의 고려신사에 그를 모시고 있으며 히라가다에 묘소가 있다.

왕인 박사가 어느 곳에 닿았는지 그의 선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전혀 알려진 바 없고 다만 『일본서기』 및 『고사기』에 짤막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문헌에는 거의 없고 한말 한치윤이 쓴 『해동역사』에 다소의 기록이 있으나 이것마저 일본 문헌을 이용한 데 불과하다.

왕인의 유허지라고 정화를 서두르는 곳이 성기동 또는 성기동, 성지골 등으로 불리는 곳이다. 구림 본 마을에서 7백m 거리의 산허이다. 이곳 냇가에는 『조암』이라 각한 돌구유가 있고 『고최씨원금조가장』이라 각한 바위도 있고 기와 파편이 많이 깔려 있다. 이곳에서 남으로 500m 거리의 계곡은 예로부터 '산태골'이라 하고 남쪽으로 3백m 거리의 산등성이를 '왕부자터'라 하며 성지골과 구림 사이 등성이를 '돌정고개' 또는 '불무청'이라 한다. 또 이 골짜기 뒷산을 주지봉 또는 문필봉이라 하고 이 산 중턱이요 성지골에서 1km 거리를 월대암이라 부르는데 이 바위 밑에 책굴과 석인상이 있다. 이곳 굴은 폭 2.5m, 길이 7m, 높이 5m 가량으로 베틀굴이라고도 하고 굴 앞 60m 거리의 바위를 '지침바위'라 한다. 책굴 앞 석인상은 2.5m 가량인데 일부에서는 석불이라 하고 일부에서는 유가의 선비상이라고도 하는데 이 석인상 곁에 옛날 문수암이 있었던 터에 20여 년 전까지도 조선시대에 지은 문산재라는 공부방이 있었다.

전설로는 왕인이 성지골에서 태어나 이곳 책굴에서 공부하고 공부방을 만들어 후진을 가르쳤으며 지침바위에서 닥나무 껍질을 벗겨 종이를 만들었다고 전해 온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보면 이곳 사람들은 백제 직지태자가 환국하면서 왕인 박사를 일본 황태자의 스승으로 천거했기 때문에 정든 고향을 버리고 몇 명의 종자와 함께 천자책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간척공사로 지금은 육지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중요한 포구였던 상대포(일명 배첩골)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는 것이다.
이 상대포는 구림에서 서북쪽 3.5km 지점이다. 왕인은 성지골을 떠나면서 마을이 보이는 돌정고개에 이르러 마을을 돌아보고 정든 고향과 작별했기 때문에 '돌정고개'라는 지명이 생겼다 한다.
왕인이 떠났다는 상대포와 도선이 떠났다는 탈천포는 각각 4km의 거리다.

이 전설을 근거로 이곳 성기동은 76년 도지정 문화재가 되고 87년 왕인묘(王仁廟)를 설립, 이 일대를 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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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