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 백제의 월나군(月奈郡)이던 것을 통일 신라 경덕왕이 757년(경덕왕 16)에 영암군(靈岩郡)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995년(성종 14)에는 낭주(朗州)로 승격하여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에 안남도호부가 전주로 옮겨감에 따라 다시 영암군(靈岩郡)이 되었다.
청동기시대
- 타제석기, 패총 등이 다수 발굴되고 있으나 청동기시대 때부터 집단으로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임
- 청동기시대 장천리 선사주거지와 900여기에 달하는 고인돌 세형동검과 (전)구림출토 청동기 용범(국보 제231호)등의 유물에서 당시 하이테크(Hightech) 문화 집단이 거주하였던 지역임을 알 수 있음
삼한시대
- 마한 중심나라 목지국의 최후중심권이 이곳으로 54국중 월지국으로 추정됨. 기원후 1~5세기까지 대형옹관고분문화 라는 독특한 영산강 유역문화를 창조하였고, 옹관제조기술은 옹기 제조 기술의 바탕이 되었음
- 대형옹관고분 100여기 분포하고 있으며 시종 내동리 쌍무덤은 3세기의 것으로 일본의 전방후원분 형성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음
삼국시대
- 백제국의 월나군이라 칭하여옴.
- 왕인박사가 AD 405년 일본 응신천황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 아스카문화의 비조가 되었음
- 중국과 일본 등의 국제 교역항으로 상대포가 있었으며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항구로 유명함, 신라말 최치원, 최승우, 김가기 등이 당나라에 갈 때도 이곳을 이용하였음
- 영암~흑산도 앞바다~산동반도로 가는 해로가 오래전부터 이용되고 있었던 문헌 기록이 있음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
-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영암군으로 개칭
- 구림토기요지(사적338호)는 시유도기문화의 발상지이며, 해남의 녹자, 강진 청자 제조기술의 원동력이 되었음
- 월출산 천황봉 소사터에서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천신제(삼국사기 제사조)를 지내 왔다고 전함
- 선승 도선국사(826~898년)의 풍수지리설은 고려 건국이념의 기초가 되었음
후삼국시대
- 후백제 견훤왕과 고려 태조 왕건이 해상권 장악을 위한 최대의 격전지로서 칼을 갈기 위해 숫돌을 파내어 생긴 여석산 천지 등에서 엿볼 수 있음
고려시대
- 성종14년(995년)에 안남도호부의 하나인 낭주로 되었다가 현종9년(1018년) 다시 영암으로 개칭 지금에 이르고 있음
- 별박사 최지몽 (907~987)이 유학과 천문학으로 고려 건국과 고려초기 왕조 안정에 기여하였음
- 우리나라 최대의 마애불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과 1009년에 건립된 성풍사지 5층석탑(보물 제1118호), 도갑사 석조여래좌상(보물89호) 등에서 영암의 불교문화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음
- 우리나라 3대 해신당의 하나인 남해신사에서는 고려 현종때부터 국조오례의에 의하여 해신제를 지내왔음
조선시대
- 행정구역은 완도의 장좌도(청해진), 남으로 보길도, 추자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였으며 1409년 진도가 진도군으로 분할되고 삼산면, 옥천면, 화원면 일대가 해남으로 편입되었으며, 1896년 보길도,추자도가 완도군으로 북평면, 송지면 등이 해남군으로 이속되고, 나주에 속한 시종ㆍ신북면 일부와 금정면이 영암군으로 편입됨
- 인구는 1423년도에 1,229명(세종실록지리지), 1789년에 29,288명(여지도서)으로 기록됨
- 향약을 기초로한 구림대동계는 1565년(명종20년)에 창립되어 향약적 지방의 질서를 확립
- 문학으로 오한 박성건의 금성별곡, 삼당시인 고죽 최경창, 연촌 최덕지선생과 학성군 김 완장군 등 수많은 명인을 배출
- 영암인 악성 김창조(1856~1919년) 선생은 민족정서를 승화시킨 불후의 명장으로 가야금산조를 창시하고 한성기, 김죽파, 김병호 명인을 배출한 산조 음악의 본향
대한민국
- 1979년 영암면이, 2003년 삼호면이 읍으로 승격 2읍 9면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음
- 우리 영암은 1965년 141,489명이 거주하였으나 이농 현상과 학군 등으로 1995년에는 62,400명까지 줄어들었으며, 현재 인구수는 53,052명으로 감소 추세임
- 1988년 월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됨(제20호)
- 대한민국 제헌 헌법을 기초하신 건국 원훈 낭산 김준연 선생의 고향으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인걸의 고장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