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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림도기요지 1차 발굴조사 보고서(요약)

2008-12-17   |   관리자조회수 : 2685

靈岩 鳩林里 陶器窯址 발굴조사 약보고서 (1차)

 

발굴기관 :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1. 位置와 環境

全羅南道 靈岩郡 南西部에 위치하는 郡西面 鳩林里는 東쪽으로는 해발 809m 의 月出山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北으로 영산강 支流를 경계로 하여 3~5세기의 甕棺墓․土壙墓가 밀집되어 있는 始終面․都浦面과 접하고 있으며 南쪽으로는 靈岩郡의 最南端인 鶴山面, 城田面과 경계되어 있다. 西쪽으로는 옛부터 文化交易의 交通路인 榮山江의 支流가 흐르던 곳이 학파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조성된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한반도의 西南部에 위치하여 先史時代부터 甕棺墓의 墓製를 고수하는 독특한 문화배경을 갖고 있는 靈岩郡의 沿革은 1986年 2月에 발행된 靈岩郡 지표조사보고인 “영암군의 문화유적”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므로 재론을 피하기로 하나, 靈岩이 三國時代 百濟의 月奈郡으로 記錄되어 (東國輿地勝覽) 百濟멸망후 唐에 의하여 설치되었다가 664年에 폐지된 唐의 都督府인 南帶方州(現在의 會津)와 인접하여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對中國交流의 海路 出發地로 널리 알려진 地域임을 상기할 때 鳩林里 土器窯地는 그 地理的 位置와 歷史的 배경이 주목되는 遺蹟이다. 더우기 東鳩林里는 東쪽에 王仁博士 탄생설화가 얽혀있는 聖基洞이 인접하여 있고 西쪽에는 王仁博士 渡日 基點으로 傳來되는 上臺浦가 있고 마주보이는 곳에 배첩골 等의 地名이 있어 當時 航路로 利用된 많은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東鳩林里 土器窯址는 영암읍에서 목포에 이르는 819번 국도변에 있는 郡西面所在地에서 목포로 불과 500여m 가면 속칭 돌정고개라는 언덕에 이르는데 언덕을 넘어서면 왼쪽(東쪽)에는 1987年에 完工된 王仁博士紀念館이 있고 오른쪽(西쪽)에 東鳩林 高等學校를 지나 西쪽으로 얕은 구릉을 따라가는 東西로 놓인 小路北便에 위치한다. 길이 2㎞에 달하는 얕은 구릉은 月出山의 南西面과 연결되어 東西로 놓인 野山으로 그 南쪽 斜面 양지바르고 바람이 없는 곳에 土器窯址가 남아 있는데 이 窯址는 現在 發掘調査된 곳에서 西쪽으로 700~800m 떨어진 上臺浦까지 연결되어 窯址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규모 土器製作所이다. 이곳은 학파방조제가 築造되기 이전에는 물길이 닿는 강변이었던 곳으로 강건너 마주보이는 남송정 마을의 斜面에서도 土器破片 堆積이 地表에서 확인되고 있어 강의 연안 일대가 窯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現在 調査된 位置는 道路가 확장되면서 堆積層이 파손되어 道路邊에 土器破片, 窯壁片이 散在되어 있고 도로변에 불에 구워진 窯壁의 윤곽이 露出되어 있는 곳으로 각 기관이 수 차례에 걸쳐 地表調査하고 國立光州博物館과 國立木浦大學博物館에서 出土 土器片을 중심으로 學界에 간략하게 報告한 (1986年) 遺蹟이다.

遺蹟의 現狀은 南向한 구릉 斜面 전면이 個人所有의 墓域으로 造成되어 斜面전체에 잔디가 입혀지고 道路邊 가까이까지 民墓가 쓰여져 10여기의 墓가 가마 폐기물 堆積層 위에 있으므로 堆積層의 調査地域이나 土器製作과 관련된 遺構探索에 제한이 있는 곳이다.

 

2. 出土遺物

出土遺物은 가마 폐기물 堆積層에서 出土된 土器破片이 전부이고 窯道具나

기타 生活用具는 전혀 出土되지 않았다. 出土된 土器片은 區域別로 層位別로 分類하여 수습하였으나 各區域別로 뚜렷한 특징의 차이는 없다.

土器는 高溫燒成의 陶器인 黑灰色硬質과 吸水率이 높고 加熱이 가능한 軟質의 2種으로 大別된다.

硬質土器는 突帶裝飾 大壺, 盤口四角甁, 廣口平底壺, 甁, 縱線紋小甁 等의 器形이 主種이고 이 가운데 盤口四角甁, 廣口平底壺, 小甁의 一部는 灰釉를 施釉한것 같이 黑色 또는 綠褐色으로 表面이 유리질로 녹아 반짝이는 破片이 상당량 포함되어 있다. 이 硬質土器들은 대체로 器壁이 두껍고 氣孔이 많으며 口緣部에는 突帶 또는 深線이 장식되고 口緣처리 線이 예리한 점이 특징이다. 軟質土器에는 平底大鉢, 바래기, 굽달린 대접 圓盤形 蓋, 솥 甑(시루)等의 器形이 있다.

1次調査에서 수습된 土器는 대체로 黃赤色粘土層以上部에 쌓인 퇴적층 出土이므로 出土地域別로 큰 차이는 없으나 地域別 일반적인 현상은 다음과 같다.

① 西區 南쪽 1․2區는 다른 구역에 비하여 軟質土器가 많으며 日常用具인 솥의 破片이 出土된 점이 특이하다.

② 西1․2區 北쪽 산 언덕의 퇴적층에서는 軟質土器가 60%以上 出土되었다.

③ 東3․4․5區는 硬質의 突帶裝飾 大壺片과 盤口四角甁이 主種이다.

④ 東6區에서 7區로 넘어가는 지역에서는 軟質土器의 出土量이 많아진다.

⑤ 東11區 窯入口 出土品은 器壁이 얇은 壺片, 口緣部가 단순하게 外反된 것이 出土되어 他區域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 主目되나 土器片 數量이 적다.

① 大壺 口緣部

東2․3․4․5區 堆積層出土, 黑灰色 硬質, 口徑 33㎝, 口緣外反, 목밑에 角진 突帶를 돌림. 胎土는 고운 점토, 氣胞가 많음.

② 大壺 身片

東 6區出土, 灰色 硬質, 角진 突帶裝飾, 表面과 內面에 두드린 멍석자욱 남음, 大壺片이나 器壁이 얇고 氣胞없음.

③ 波狀紋 大壺 身片

灰黃色 硬質, 돌과 같이 硬度가 높음, 突帶裝飾되고 上段에 細線으로 波狀紋이 음각됨.

④ 壺 口緣部

東2․3․4․5區 堆積層出土, 口徑 9.4㎝, 9.8㎝, 11.3㎝, 8.5㎝, 14.4㎝, 黑灰色 硬質, 口緣外反, 口緣部의 外反角度와 頸部의 높이가 各種인 壺의 口緣部임.

⑤ 盤口 四角扁甁

東 2․3․4․5區 堆積層出土와 東5區 窯內 모래층 出土가 있음. 高 28.3㎝, 口徑 7.5㎝, 底徑 12.2㎝, 胴徑 14.5㎝, 17.8㎝, 黑灰色 硬質

⑥은 表面이 施釉된 듯이 全面이 투명한 유리질로 검게 반짝임. 胎土에 沙立섞임, 바닥은 平底인데 挿圖⑤-1과 같이 底面이 圓形과 4角形 2種類임. 右편은 바닥에 조개껍질로 받침자리가 남았는데 바닥도 釉面이 형성됨.

⑦ 甁 口緣部

東4․5區 堆積層出土, 口徑 6.1㎝, 9.6㎝, 8.4㎝, 5.8㎝ 硬質인데 검은 釉面이 형성된 것과 아닌 것 2種임.

⑧, ⑨ 平底 壺

西1區 出土, 高 18.9㎝, 口徑12㎝, 底徑 10.8㎝, 胴徑 15.4㎝, 底徑 10.8㎝

黑灰色 硬質로 表面에 黑褐色 釉面이 형성되어 있음, 口緣에 深線帶가 돌려짐, 平底바닥에 조개 받침 자욱 남음.

⑩ 壺 口緣部

東區의 堆積層 各區에서 出土, 口徑 14.6㎝, 10.4㎝, 11.2㎝, 12㎝, 黑灰色硬質器壁은 얇고 沙粒이 섞인 胎土임. 口緣은 밖으로 말리고 表面은 黑色, 黑褐色의 釉膜이 部分的으로 형성되었음.

⑪ 壺 身部

東4區 出土, 胴徑 8.4㎝, 高 9.8㎝, 黑灰色 硬質. 沙粒이 섞인 胎土를 使用하였고 器壁이 두터움. 平底이고 頸部 以上이 破失된 甁인데 이러한 形態의 甁破片은 단 한점 出土됨.

⑫ 小甁 口緣部

東4․5區 出土, 硬質로 表面에 釉面이 形成된 것과 아닌 것 2種이며 表面에 縱線紋․點線紋이 圖面과 같이 여러가지 方法으로 施紋되었다. 이 병의 전체 형태는 나팔모양의 口緣部에 球刑身, 얕은 굽이 따로 붙여진 것임.

⑬ 甁 身部

東5區 出土, 現高 7.2㎝, 胴徑 11.2㎝, 底徑 5.6㎝, 灰色硬質로 表面全体에 綠褐色釉가 두텁게 녹았음. 胴体 全面에 縱線陰刻線紋이 장식됨. 밖으로 벌어진 굽의 주변에 조개껍질이 붙음.

⑭ 注子 破片

東5區 堆積層 出土. 硬質로 表面에 黑褐釉 透明釉가 녹은 注子의 把手部와 角진 귀때 부분임. 器壁은 두텁고 氣胞가 많음.

⑮ 軟質土器 솥 破片

西1․2區 出土, 黃灰色 軟質土器로 부여지방 출토와 같은 솥의 破片으로 솥 口緣部와 胴体 中央에 붙은 把手의 形態는 圖面과 같이 2種임.

⑯ 軟質土器 底部片

西1․2區 出土, 바래기, 大鉢形 그릇의 平底部임. 圓透孔이 있는 시루의 바닥片도 數點 出土됨. 모두 加熱이 가능한 底溫燒成의 日常用器임.

⑰ 軟質土器 平底 鉢

西1․2區 出土, 高 10㎝, 口徑 30㎝ 底徑 19.6㎝, 高 8.2㎝, 口徑 20㎝, 底徑 12㎝, 크기별로 各種임.

⑱ 軟質土器 口緣部

西1․2區, 東6區의 出土品, 모두 平底大鉢의 口緣部 여러 가지 形態임.

⑲ 軟質土器 口緣部

外口緣에 突帶가 있는 大壺口緣部와 盤口形 口緣部가 黃灰色의 軟質인데 大壺나 盤口 甁이 軟質인 것은 이것뿐이고 모두 硬質임.

⑳ 軟質土器 壺 口緣部

西1․2區, 東6區 出土, 灰色軟質, 입이 넓은 缸形의 壺 口緣部 各種임.

(21) 底部片

西2區 웅덩이 露出中 出土, 上徑 32.4㎝, 現高 4㎝. 灰色으로 器壁이 두터운 硬質인데 넓은 굽이 달린 듯이 두터운 띠가 돌려진 破片으로 器形을 추정할 수 없는 바닥의 한 조각임.

(22) 平底盤의 部分

西1․2區 出土, 高 4㎝, 口徑 21.2㎝, 底徑 16.2㎝, 灰色의 器壁이 두텁고 무거운 현대 옹기 항아리 뚜껑모양의 盤破片임.

(23) 대접 破片

西1․2區 出土, 高 4.2㎝, 底徑 5.7㎝, 灰色硬質인데 表面이 유리질화되고 硬度가 높은 칼로 各지게 깎은 얕은굽에 口緣部는 안으로 숙어들었음.

(24) 底部片

퇴적층 各區에서 出土된 各種 底部임. 모두 灰色硬質로 平底, 얇은굽, 바닥을 파낸 안굽이 있음.

(25) 귀때 부분

西1區 出土, 現長 4.6㎝ 注口徑 2.7㎝. 왼쪽은 硬質이고 오른쪽은 軟質인데 어떠한 器形의 注口인지는 알 수 없음.

(26) 把手

西1區 出土, 軟質土器로 바래기 시루의 胴体 側面에 橫으로 붙은 帶狀의 把手임.

(27) 小碗形 蓋

西1․2區 웅덩이 露出中 出土, 高 2.8㎝, 口徑 7.6㎝, 灰色硬質임. 엎어놓고 소성하여 바깥쪽에 불길이 닿았으며 內面은 막손질로 表面이 고르지 않아 뚜껑인 것으로 추정됨.

(28) 圓形 印章形土器

西1區 웅덩이 露出中 出土, 高 3.2㎝, 徑 6.6㎝. 軟質로 圓形바닥에 도장의 印面과 같이 부호와 같은 線紋이 陰刻되었음.

(29) 土管

西1區 西斜面 확장중 出土, 現長 17.5㎝, 徑 5.8㎝ . 灰色硬質로 面을 칼로 다듬은 圓筒과 같은 管으로 좌우 직경이 다른 用途不明의 用具임.

(30) 平瓦片

西①․②區 웅덩이 윗편에 깔렸던 平瓦片임. 14.4×12.6㎝, 16.7×15.9㎝, 16.2×19.9㎝, 흡수율 높고 두께가 얇은 黃灰色, 赤色의 瓦片으로 表面에 斜格線紋이 施紋되었음.

(31) 波狀紋 壺 口緣部

東6區 出土, 灰色硬質로 器壁이 얇음. 肩部에 橫線이 陰刻으로 돌려지고 上下에 3줄짜리 針線具로 波狀紋을 陰刻되었음.

(32) 底部片

東6區 出土, 底徑 10.1㎝. 灰色硬質로 外反된 굽이 달렸음. 內底面이 거칠게 처리되어 있어 壺 또는 甁의 바닥으로 추정됨.

(33) 壺 口緣部

東11區 窯入口 퇴적층 出土, 口徑 15.2㎝. 灰白色의 軟質로 좁은 口緣部의 간결한 線 처리는 三國時代 土器 壺와 같은 형태임. 어깨부분부터 팽배하여진 둥근 항아리로 추정되는 器形임. 胎土도 정선된 것이고 器壁이 얇아 東 4․5區의 일반적인 出土品과는 質과 形態가 특이함.

(34) 壺 口緣部

西5區 窯부근 堆積下層 出土, 口徑 13.9㎝, 胴徑 25.9㎝, 灰色硬質의 口緣이 얇게 밖으로 말린 둥근 항아리임. 表面에 點烈紋이 있는 橫線帶가 2段 돌려지고 그 사이 사이에 細線의 波狀紋이 陰刻됨. 肩部에 透孔이 있는 3角形 꼭지가 붙었음. 東區의 흑색 퇴적층의 일반적인 出土品과는 形態와 質이 區別됨.

(35) 點線紋 壺片

西1區 南쪽 出土로 灰色硬質이고 器壁이 얇다. 表面에는 伽倻土器係의 連珠

紋帶. 點線이 斜格線을 形成한 點線紋이 施紋됨. 역시 일반적인 出土品과는 異形의 土器片으로 단 1片이 出土됨.

(36) 扁球形 甁 身部

西1․2區 出土, 現高 6.7㎝, 胴徑 13.1㎝, 底徑 6.1㎝. 黑灰色 硬質로 頸部 以上은 破失됨. 胴體중앙에는 금속기의 접합부와 같은 突帶가 돌려지고 벌어진 굽도 말아 올렸음. 上面은 2段으로 區劃하고 斜線의 點線紋이 장식됨. 表面에 陰刻線이 장식된 扁球甁는 1點 뿐임.

(37) 甁 口緣部

西4區 窯上部 堆積層出土. 口徑 8.8㎝, 口徑 11.4㎝. 硬質로 錄褐油 釉藥이 흘렀음. 왼쪽은 목에 陰刻 橫線帶가 돌려졌고 오른쪽은 細線으로 불규칙한 波狀紋이 陰刻됨

(38) 短涇 平底 壺

西4區 窯內 모래 堆積 除去中 出土. 高 23.1㎝, 口徑 13.8㎝, 胴徑 19.4㎝, 底徑 11.2㎝, 黃褐色釉 硬質임. 表面 全體는 黃褐色 釉面이 형성됨. 口緣은 深線이 들어가고 平底에는 조개껍질 받침이 남아 있으며 胎土는 沙粒이 섞임.

(39) 綠褐釉 平底 壺

西4區 窯內 모래퇴적 除去中 出土. 硬質로 高溫에 휘어지고 外面全面과 바닥內面까지 綠褐釉가 엉키고 줄줄 흘렀음. 火度가 높은 部分은 綠色으로, 얕은 부분은 黑褐色으로 녹아 釉面이 고르지 않음. 平底의 바닥에 조개껍질 받침 자욱이 남아 있음.

(40) 扁球形 甁

西4區 窯內 모래퇴적 除去中 出土, 高 9㎝, 口徑 1.8㎝, 胴徑 14㎝, 底徑 7.8㎝. 黑灰色 硬質로 表面一部에 黑色 釉面이 형성되었고 表面에 굵은 모래가 많이 붙은 不良品임. 胴體中央과 深線이 돌려있음.

(41) 軟質土器 鉢

西4窯 굴뚝 內壁 露出中 出土. 高 7.6㎝, 口徑 17.4㎝, 底徑 9.1㎝. 表面에 黑色煙이 발려진 軟質의 굽달린 鉢임. 鉢은 퇴적층에서 전혀 출토되지 않았음.

(42) 圓盤形 蓋

西7區 窯內 모래퇴적 除土中 出土. 高4㎝, 口徑3.6㎝, 底徑 32.4㎝. 黑色煙이 表面에 칠해진 軟質土器임. 蓋表中央에 꼭지가 달렸던 흔적이 있음.

(43) 軟質土器 鉢

西7區 窯內 上部에서 出土. 底徑 10㎝, 6㎝, 7.6㎝. 黃灰色 軟質土器로 器壁이 얇은 굴달린 대접의 바닥 부분임. 퇴적층에서는 출토되지 않은 器形임.

(44) 錐

地表수집, 長 5.6㎝, 徑 2.1㎝. 黃赤色으로 흡수율이 높은 硬質. 그 물추임.

(45) 淨甁

地表수집, 黑色硬質로 注口部의 透孔이 남아있는 淨甁의 身部 破片임. 淨甁破片 出土例가 없음.

 

3. 맺음말

東鳩林理 土器窯址의 一部分에 실시한 1次發掘調査에서는 앞부분이 절단되었지만 전체구조를 명백하게 알 수 있는 原形을 유지하고 있는 土器 燒成 窯가 2基 發掘되었다.

土器 窯의 構造는 아래쪽으로부터 경사면을 굴을 파들어가서 窯床은 地下가 되는 半地下式의 單室窯로 窯床 平面은 下廣上挾의 소위 독사머리 모양으로 경사도는 앞쪽이 10°內外를 유지하는 平面이다가 급격히 20°~25°로 경사가 급해지고 좁아져 窯床의 끝 부분이 굴뚝으로 연장되어 올라가는 구조인데 이러한 기본 구조는 高敞 雲谷理(全州市立博物館 : 高敞, 雅山地區支石墓發掘報告書, 1984. 12) 益山 新龍理(全州市立博物館 : 益山新龍理百濟土器窯址 發掘調査略報, 1987. 5)의 百濟土器 窯와 같아 백제토기가마의 특징이 강한 형식이다. 특히 半地下式, 독사머리 모양의 平面等의 특징은 日本 大阪의「陶邑窯跡」이라 명명된 古窯址發掘調査 報告에(大阪府敎育委員會 : 陶邑 ; 1976) 5세기 중반에 出現하는 가마의 형태로 보고되어 있다.

다만 봉통 (焚口)이 타원형으로 파이고 봉통入口에는 割石으로 짜놓은 排水路역할로 추정되는 시설이 달려있고 窯內의 溫度를 유지하기 위한 기능으로보이는 굴뚝옆과 天井의 구멍이 시설되어 있는 점이 特異한 構造로 注目된다.

窯의 構造로 볼때 6세기로 추정되고 있는 益山 新龍理 百濟土器窯와 가장 유사한데 新龍理 窯에 비하여 高溫을 유지할 수 있는 창불구멍이 조성된 점은 가마의 기능상 발달된 것으로 판단된다 .

出土遺物인 土器는 대부분이 高溫燒成의 陶器質인데 이러한 특징은 高敞 雲谷理窯 出土 土器가 1200℃의 高溫燒成陶器質로 報告되어 있고, 靈岩郡 始終面 4~5세기 古墳郡의 出土土器도 灰靑色 硬質로 報告되어 있어 地域的 特徵이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土器의 形態로 볼때는 鳩林理의 出土品 가운데 突帶裝飾大壺, 4角扁甁, 廣口小甁과 유사한 것은 8~9세기로 추정되는 忠南 保寧軍 眞竹理 土器窯址, 益山의 彌勒寺址, 울릉도 천부동 2號墳등 경주와 떨어진 지역에서 출토된 바 있다. 이들은 鳩林理 出土品에 비하여 口緣部가 좁아지고 口緣의 線이 부드럽게 처리된 점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三國史記 東城王20年條의 記錄에 依하여 東城王20年(498年)에 百濟에 복속된 것으로 알려진 濟州島(耽羅)의 郭支貝塚 (濟州大學校博物館 : 1985) 에서도 陶質의 大壺, 4角甁, 平底壺의 器形이 5~7세기로 추정되고 있는 鐵物과 동반출토되고 있어 樣式上의 비교는 될 수 있으나 확실한 편년은 자료의 빈곤으로 어려운 형편이다 .

그러나 鳩林理 窯地와 규모나 위치로 볼 때 이는 巨大한 勢力圈과 결속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窯址의 存續時期는 窯의 構造와 郭支貝塚出土品을 기준으로 볼때는 對中國交流의 거점으로 利用이 잦은 시기인 백제말기부터 통일신라 초기까지 6~7세기로 추정할 수 있고, 益山 彌勒寺址 出土인 大中 12年(858年) 銘 大壺片을 기준으로 器形의 유사성을 비교하여 볼 때는 후백제 견훤 세력인下인 9세기로 추정해 볼 수 있으나 확실한 편년은 좀더 확실한 資料의 出現後 가능할 것이다.

東鳩林理의 地理․歷史的 位置로 볼 때 中國․日本과의 交流도 가능함으로 中國, 日本과의 비교 고찰도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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