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박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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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나구찌 다이스케, 2008, 〈확인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현대인들의 기억 만들기:한일 양국의 왕인현장 사례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편저자 : 스나구찌 다이스케   |   번역자 :   |   유형 : 기타( 논문 )   |   쪽수 : 52   |   총권수 : 권
스나구찌 다이스케, 2008, 〈확인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현대인들의 기억 만들기:한일 양국의 왕인현장 사례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이미지 1

백제에서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문화의 발전에 공헌했다고 전해져 있는 왕인. 현재 한일 양국에 있어 왕인의 유적지가 존재한다. 일본 大阪府 枚方市에는 왕인의 무덤이 있다. 정식명칭은 ‘傳王仁墓’라고 하는데, 1938년에 大阪府에서 史跡으로 지적을 받은 곳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전라남도 영암군이 왕인의 출생지로 되어 있다. 이곳도 1976년에 왕인박사유적지로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왕인의 출생지 및 무덤에 대한 고대 기록은 존재하지 않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양국에서 왕인의 유적이 만들어진 것인가. 한일 양국의 왕인 유적지의 토대 부분이 만들어진 시기는 일제시대이다. 당시 일본정부는 내선일체 정책을 반영시키기 위해 왕인을 현창했다. 왕인이 백제에서 일본에 문화문물을 가져와서 일본문화 발전에 공헌했다는 점이 활용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 일환으로 한국에서는 근거도 없이 왕인의 출생지가 영암군이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왕인이 영암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일제시대에 李秉延이 편찬한 『朝鮮?與勝覽』인데, 이 기록은 당시의 일본정부의 현창운동의 영향이 미쳐서 서술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에서도 江戶時代의 유학자인 ?河誠所가 자연석을 왕인의 무덤이라고 현창한 것이 시작이었는데, 일제시대에 들어와 정부는 묘역의 정비를 비롯한 여러 현창을 실행해왔다. 많은 계획이 있었지만, 淸日戰爭?露日戰爭 때문에 결국은 무산되어 버려, 2차대전이 끝나서 왕인 현창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것으로 왕인을 현창할 필요가 없어진 일본정부는 한일 양국의 왕인 현창운동에 대한 처리를 하지 않는 채로 방치해왔다. 1970년대에 들어와 한국에서는 농민운동가이며, 국회의원이었던 金昌洙가 왕인을 다시 주목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현창했던 영암군이 왕인의 출생지로서의 자리를 잡게 되어 왕인유적지는 지금의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에 황폐가 심해진 묘역을 지역주민들이 ‘왕인총환경수호회’를 만들고 묘역의 환경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현재 양국의 유적지에서는 매년 축제가 열려 있고, 그때마다 서로 지방의 왕인 유적지의 관계자, 지방 역원들을 초대해서 민간차원으로서의 교류가 전개되어 있다. 그 교류의 성과인지 최근에 枚方市의 왕인 묘역에 기념비나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이것이 근거가 없는 왕인의 이야기를 기념물을 통해서 사실화 하려고 하는 행동으로 보인다. 현재 양국 도시에서 우호도시제휴까지 성립되어 교류 수준이 매우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만들어진 역사’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올바른 국제교류를 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과거의 역사 속에 있었던 과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교류를 진행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다고 생각된다. 본 연구가 제시하는 이 한일교류의 문제점이 앞으로의 다른 한일교류에도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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