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박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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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永壽, 1933. 04. 01, 〈王仁博士의 墓, 大阪管原村에 잇는 百濟博士의 墓로〉, 《삼천리》제5권 제4호.

편저자 : 朴永壽   |   번역자 :   |   유형 : 기타( 기행문 )   |   쪽수 : 2 (86-87)   |   총권수 : 권

王仁博士의 墓, 大阪管原村에 잇는 百濟博士의 墓로 大阪 朴永壽 大阪 停車場에서 기차를 잡어타고 京都편으로 향하야 약 70리(朝鮮 里數)를 가느라면 長尾驛이란 조고마한 깨끗한 촌락에 도착하게 된다. 이 역에서 또한 3리 가량 산촌을 향하야 드러가면 陽地 쪽에 수십 戶가 비둘기 둥주리가치 모여 사는 마을이 잇고 그 藤坂이란 마을의 뒷 便山谷 수천 년 묵은 송림이 욱어진 자리에 크다란 무덤이 노여 잇스니 그 무덤 압헤는 나무 木碑로 「王仁博士之墓」 라고 크다라케 써 노은 것이 잇다. 아아 이것이 一代의 巨儒요 百濟의 박사이든 王仁先生이 應神天皇의 초청을 바더 論語와 小學을 질머지고 바다를 건너드러가서 학문을 전하든 1천년 전의 자최이다. 그때 百濟는 新羅 高句麗와 아울너 西으로 中國와 印度의 문명을 바더드리고 또한 百濟人의 독특한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야 千古에 冠絶하는 문명을 가지어서 宇內에 稱覇하든 터이라 百濟 古都 扶餘에 발을 드러놋는 이들이 천년 후인 지금에까지 그 문화의 자최를 讚歎하여 마지 안으며 또한 역사에 나타나는 빗나는 百濟 史料에 아직까지 欽仰하는 소리를 끈지 안은 것으로 보아 이제 새삼스럽게 百濟文明을 운운하기는 피하겟지만 엇잿든 이 문명의 흐름이 大阪에까지 미처 천년 후의 後腐를 感慨無量하게 한다. 나는 함께 갓든 동무를 떼워노코 혼자 松林속의 박사무덤 겻흘 거닐면서 가슴 가운데 떠오르Š” 여러 가지 꿈을 막을 길이 업섯다. 百濟朝廷의 구름 가튼 학자들 중에 그 한 분이신 王仁博士께서 日本에 문명을 전하려고 물로 천리 산으로 천리 異邦에 이르러 그곳 臣에 孔子曰 孟子曰을 가르치고 進退의 예의와 三綱五倫을 전하며 힌 수염에 도포자락을 드날니면서 處處坊坊을<86> 차저 講堂을 세이고 儒人學者를 모아 글 가르치든 일 더구나 政司에 禮樂을 大宗으로 삼어 管絃之樂을 가르치는 樣 이리하야 문명을 四海에 펄치든 百濟博士 王仁! 나는 눈을 감고 한참 안젓다가 父祖의 무덤에 온 듯 안타까운 생각에 가슴을 뜻다가 憤墓의 풀을 헤우적 거렷다. 무덤 우에는 必然 천년 전에 뿌리를 두엇슬 뜻한 잔듸가 3, 4월 陽氣에 차츰 연두색 속입이 나려한다. 나는 열손 까닭으로 무덤 우의 풀을 허비엇다. 그 길로 다시 이 마을에 남어잇슬 박사의 유적을 찻고저 동리로 내려왓다. 동리에는 소학교가 잇섯다. 朝鮮도 그런지 모르겟지만 이곳은 그 마을의 名勝古蹟을 알자면 소학교를 찻는 것이 가장 經路이다. 소학교에서는 대개 그 地方史蹟 邑誌 等을 守藏하고 잇다. 나는 교장더러 王仁博士의 사적에 대하야 역사적으로 무른 뒤 그 유적이 남어잇느냐 하니까 그 대답이 녜전 몃 해 전에는 이곳에 處處에 王仁博士의 낭겨논 발자최가 잇든 것을 藤田이란 사랑이 王仁博士 神社와 박물관을 짓는다고 박사가 쓰든 벼루 붓 論語 小學冊과 책상 등을 사방에서 구하여 왓고 또 박사가 입고 계시든 도포자락이나 사모관대를 모다 모아두엇든데 그리고 더구나 全國 各 府縣으로 도라다니며 神社建設基金으로 수만 원 모엿는데 슬풀사 그 사람이 사심을 품고 그 돈을 私腹에 채이는 동시에 멀니 도망하여 버렷스며 따라 그 만튼 귀중한 史料도 엇더케 되는지 한 가지인들 차즐 길이 업다고 한다. 그리면서 이 실패의 뒤를 이어 듯건데 서울 잇는 某處에서 발기하야 王仁博士 神社를 짓고저 성금을 모이고 잇다는 소문이 들닌다고 한다. 그런데 한가지 첨가하여 들려주는 말에 원래 王仁博士의 묘는 두 군대가 잇는데 한곳 것은 「王仁의 塚」이라고 하여 흙을 둥그러케 모아 노앗슬 뿐인 바 학자의 말에 약 4백년 전에 일부러 만든 것인 듯 하다고 한다. 그러니 아마 王博士의 묘는 지금 내가 보고 온 것이 진정할 것이다. 그런데 王仁博士가 게시든 마을이매 이곳에 필연 직계자손들이 잇스리라 하야 차저 보앗스나 누구하나 뚜드러지게 나서는 이가 업섯고 모다 王仁博士의 자손가치 보이며 모다 아닌 것 가치도 보여진다. 그러나 大阪一帶와 이 管原村에도 朴氏 金氏하는 姓가진 이가 여러 戶가 잇다. 그네들은 조선서 왓노라 하니까 반가히 茶菓를 대접하여 준다. 실로 大阪에도 高麗橋하는 다리가 아직 잇는 것으로 보아 大阪近傍에는 녯 朝鮮의 유적이 만흔 것을 알 수 잇겟다. 王仁博士는 여전히 천년 전에 누엇든대로 땅을 벼개 삼고 하늘을 향하고 閑雲으로 벗하며 지내는데 나는 홀로 저녁까지 촌락으로 거닐면서 석양녁헤야 大阪으로 가는 차에 올나 탓다. 備考 王仁博士가 日本간 해가 西曆 285년, 百濟 古稱王 52년, 應神天皇 16년이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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