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박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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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경, 2016, 〈‘同祖’ 계보의 변화를 통해 본 王仁, 王辰爾系 씨족〉, 《韓日關係史硏究》53, 한일관계사학회.

편저자 : 서보경   |   번역자 :   |   유형 : 기타( 논문 )   |   쪽수 : 51 (65-115)   |   총권수 : 권
서보경, 2016, 〈‘同祖’ 계보의 변화를 통해 본 王仁, 王辰爾系 씨족〉, 《韓日關係史硏究》53, 한일관계사학회. 이미지 1

Ⅰ. 머리말 Ⅱ. ‘始祖加上’을 통한 ‘同祖’ 관계 변화 Ⅲ. ‘동조’계보의 이탈과 편입을 통해본 西文氏 Ⅳ. 맺음말 『일본서기』에 ‘왕인과 왕진이의 후손’이라 기재된 가와치노후미(西文)씨 일족이 『속일본기』와 『신찬성씨록』의 계보 기록에는 ‘漢高帝(祖)의 후손인 왕인’과 ‘백제 貴須王의 후손인 진이’의 후손이라 적혀 있다. 이와같이 왕인과 왕진이계 씨족의 조상전승이 다르게 기재된 것은 왕인계 후미(文), 다케후(武生)씨와 왕진이계 츠(津), 후네(船), 후지이(葛井)씨 등이 각기 改姓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서기』 단계에 기재된 조상 위에 새로운 시조를 더하여 계보를 조작한 데 그 원인이 있다. 또한 延曆年間에는 왕인계 후미, 다케후씨와 왕진이계 츠, 후네, 후지이씨 등의 ‘改姓請願’이 허가되었다. 고대 일본 사회에서는 ‘改姓請願’이 인정되면 각 씨가 주장한 계보는 공적인 문건이 되었다. 따라서 이른바 ‘始祖加上’을 통해 왕인계 후미, 다케후씨 등은 중국계 이주 씨족이 되고, 왕진이계 츠, 후네, 후지 이씨 등은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분류되어 『신찬성씨록』에 게재되었다. 또한 교키(行基)와 구다라노코니키시(百濟王)씨는 쇼무(聖武)천황의 대불조영 사업을 매개로 계보상의 「同祖」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 결과 「大僧上舍利甁記」의 명문에 기재된 ‘와니(王爾, 王仁)가 백제 왕자’라는 계보가 공인되었다. 따라서 왕인계 가와치노후미씨가 ‘한 고조의 후손’이라는 계보는 개성을 청원하는 단계의 ‘시조가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왕인, 왕진이계 씨족의 개성청원이 이루어진 연력년간에 백제계 도래씨족으로 최고의 위상을 보유한 씨족은 왕진이계 츠노무라지(津連)였다. 특히 간무(桓武)천황의 측근으로 활동한 츠노무라지마미치(津連眞道)는 『속일본기』 편찬 작업에 임하면서 후지와라(藤原)씨와 구다라노코니키시씨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관계를 매개로 하여 백제계 이주씨족의 후손인 츠노무라지마미치는 백제 왕족과 계보상의 「同祖」 관계를 형성하였고, 그 결과 왕진이계 가와치노후미씨는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공인되어 『속일본기』와 『성씨록』에 기재되었다. 요컨대 왕인과 왕진이계 가와치노후미씨는 근접한 지역에서 ‘의제적 동족’ 관계를 형성하며 ‘문필’에 관한 소양을 갖춘 관인으로 출사할 때나 대학에 입학할 때, 조정의 필요에 따라 동원될 경우는 가와치노후미씨 일족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이들은 ‘문필’이라는 유사 직종에 종사하며 賜姓, 敍位, 任官의 경우만 아니라, 봉사의 기원을 기록한 씨족계보의 기술 내용에 이르기까지 각 씨의 격을 높이기 위한 경쟁을 지속하며 고대 일본의 관인사회에 적응해 나간 존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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