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박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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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舜哲, 1999, 〈백제의 왕인(王仁)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달한 것은 405년〉, 《製紙界》 317, 한국제지공업연합회.

편저자 : 김순철   |   번역자 :   |   유형 : 기타( 기고문 )   |   쪽수 : 3 (32-34)   |   총권수 : 권
金舜哲, 1999, 〈백제의 왕인(王仁)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달한 것은 405년〉, 《製紙界》 317,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미지 1

우리나라의 사서(史書)에는 왕인(王仁)의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와 고사기(古事記 고지키)에 있을 뿐이고 이것을 인용한 것들이 있을 뿐이며, 전남 영암군 군서면에 있는 왕인의 석상에 대해서도 기록은 없다. 그런데 왕인이 일본을 건너간 연대가 285년, 375년, 그리고 405년 등으로 나타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표). 이것은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내용을 우리나라 연대와 비교 색출한 연대일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의 응신(응신 오오진)왕 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15년 8월 6일에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와 함께 말 두 마리를 보냈다. 일본에 간 아직기는 말을 길렀는데 경서도 잘 읽어서 태자(太子)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 오치노와키 이라쓰코)를 가르치게 했다. 응신(應神 오오진)왕이 아직기에게 더 유능한 학자가 있느냐 묻자 아직기는 왕인(王仁)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응신왕(應神王)은 황전별(荒田別 아라다와케), 무별(巫別 가무나기와케) 등을 백제에 보내 왕인을 오게 했다. 이에 따라 16년 2월 왕인이 일본에 와서 태자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를 가르쳤다. 이 해에 백제의 아하왕(阿花王)이 서거했다. 그래서 일왕이 볼모로 잡혀왔던 아화왕(阿花王)의 태가 직지(直支)에게 돌아가서 왕위를 이어받으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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