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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화, 2010, 〈5세기 백제의 정국변동과 倭 5王의 작호〉, 《한국고대사연구》 60, 한국고대사학회.

편저자 : 홍성화   |   번역자 :   |   유형 : 기타( 논문 )   |   쪽수 : 41 (75-115)   |   총권수 : 권
홍성화, 2010, 〈5세기 백제의 정국변동과 倭 5王의 작호〉, 《한국고대사연구》 60, 한국고대사학회. 이미지 1

本考는 5세기 百濟王權과 중국 남조의 사서인 『宋書』에 나오는 倭의 5王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한일학계에 쟁점으로 남아있는 5세기의 한일관계를 재조명해보고자 하였다. 우선 5세기 초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廣開土王碑文의 경우 그 해석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한반도 내 倭의 활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및 고구려에 대항하는 주체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36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왔던 七支刀의 銘文을 재고찰하면 七支刀는 369년이 아니라 408년 11월16일 백제의 腆支王 4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七支刀를 통해 5세기 초 百濟와 倭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즉, 七支刀 銘文에 나오는 ‘泰口四年’ 및 ‘宜供供侯王’ 등은 百濟가 주체가 되어 倭王인 侯王이 百濟에 신속하고 있던 侯王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5세기 초 百濟와 高句麗의 전쟁에서 倭가 주도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百濟가 주체가 되어 수행한 전쟁에 倭가 지원군의 형태로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宋書』에서 5세기의 소위 倭 5王이 한반도 남부에 대한 諸軍事權을 자칭하고 제수를 요청했던 문제가 쟁점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百濟가 관할하고 있었던 영역을 倭가 자신의 영역으로 주장하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요청은 倭王 珍에 있어서나 武에게 있어서 百濟와 軋轢이 있었던 毗有王 시기 또는 웅진 초기 등 百濟의 정국변동이 있었던 경우에 요청되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腆支王 이래 百濟와 야마토 倭가 양국 왕족 간 혼인에 의한 혈연, 인척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촉발된 사건이며, 이처럼 백제 왕실과 야마토 왕실은 4세기 말 이래 지속적인 인적교류를 통해 화친을 맺음으로써 정치적, 군사적으로 유대감을 강화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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