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박사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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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제67권 「인물고(人物考)」

편저자 : 한치윤   |   번역자 :   |   유형 :   |   쪽수 : 왕인(王仁)3   |   총권수 : 70권
『해동역사(海東繹史)』 제67권 「인물고(人物考)」 이미지 1

물부무경(物部茂卿)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선정 부자(先正夫子)들에 대해 논하면서 사문(斯文)에 크게 공덕을 끼친 분을 들어 말하기를, ‘아득한 옛날에 우리 동방의 나라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지각(知覺)이 없었다. 그러다가 왕인씨(王仁氏)가 있은 뒤에야 백성들이 비로소 글자를 알았고, 황비씨(黃備氏)가 있은 뒤에야 경예(經藝)가 비로소 전해졌으며, 관원씨(管原氏)가 있은 뒤에야 문사(文史)에 통할 수가 있었고, 성와씨(惺窩氏)가 있은 뒤에야 사람마다 말을 할 때에 천(天)을 말하고 성(聖)을 말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네 분의 군자는 비록 학궁(學宮)에서 대대로 제사를 지내더라도 괜찮다.’ 하였다.” 하였다. 《일본의 조래집(徂徠集)》 등익근(藤益根)이 말하기를, “무릇 왕인이 경사(經史)를 읽을 적에는 반드시 위(魏)ㆍ진(晉)의 음으로 읽어 태자에게 전수하였을 테고, 속어(俗語)를 쓰고 한어(韓語)로 답하여 읽는 것을 잘못되게 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니, 그 후에도 왕왕 그 음에 익숙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0대(代)를 지나고 4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사이에는 그 업을 전수받은 사람으로는 오직 동서(東西)의 두 사씨(史氏)만이 대대로 그 직책을 수행하면서 사관(史官)으로 있었을 뿐이다.” 하였다. 《효경범례(孝經凡例)》 살펴보건대, 백제의 인물로서 일본의 서적에 보이는 자는 몇 사람이 있다. 그러나 모두 드러낼 만한 사실이 없으며, 또 교빙지(交聘志)에 모두 실려 있으므로 -통일본조(通日本條)에 나온다.- 여기에서는 다시 싣지 않는다. 왕인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일본에서 학문을 창시하여 일본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므로 특별히 갖추어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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